버즈빌 퇴사 회고

Sungwon Lee
7 min readJan 18, 2023

“백수가 되었습니다.” - 웨일, 2023년 1월 13일

버즈빌에서 받은 컴퓨터의 공장 초기화 버튼을 누르고 난 뒤에야 퇴사했다는 실감이 났다. 처음 퇴사 의사를 밝힌 것은 약 4개월 전이었다. 영과 존 두 대표님에게 어렵게 얘기를 꺼냈다. 아쉬운 마음에 오랜 기간 함께 얘기를 나눴다. 고맙게도 두 대표님의 응원을 받으며 새로운 스타트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다. 즉, 제대로 된 시작을 하려면 제대로 된 끝을 맺어야 한다. 이 글을 통해 4년 반 동안의 버즈빌 여정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되돌아보기

2018년 7월 9일, 버즈빌에 첫 출근을 시작했다. 우리의 이전 스타트업이었던 42컴퍼니가 버즈빌에 인수된지 2주 정도 지난 날이었다. 입구에는 42컴퍼니 멤버들을 환영한다는 메시지가 적혀있었다. 각자의 자리에는 노트와 후드 등이 포함된 웰컴 키트가 놓여 있었다. 그 뒤로 일주일은 온보딩을 받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합류 당시 CPO를 맡고 있던 Jay가 물어본 질문이 떠오른다. “Whale은 PM으로 합류하실 건가요 개발자로 합류하실 건가요?” 난 그간 스타트업 씬에서 구르느라 집중하지 못했던 개발 역량을 키워보고 싶었다. 운이 좋게도 버즈빌의 신규 프로젝트인 버즈애드 베네핏 개발을 맡게 되었다. 신규 생성부터 시작한 제품이 성장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절대 잊지 못할 경험이다. 해당 프로젝트는 버즈빌 매출의 70% 이상을 견인하는 제품이 되었다.

그해 말 쯤 CEO 영이 내게 좀 더 많은 기여를 해줄 수 있을지 물어봤다. 어떤 역할을 맡아서 어떤 기여를 하고 싶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주로 병목을 찾아 헤매는 사람 같다고 답했다. 당시 버즈빌의 병목은 너무 빠르게 성장하느라 복잡해진 설계라고 판단했고, 설계를 맡으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그렇게 나는 치프 아키텍트(Chief Architect)가 되었다. (최고 설계자는 Enterprise Architect라고도 불리는데, 왠지 C가 앞에 붙은 호칭을 사용하고 싶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스타트업 씬에서 닥치는대로 개발해왔던 내가 설계에 대해 얼마나 알았겠는가. 다행이도 그간 좋은 동료들 (특히 인범, 호성) 덕분에 좋은 설계와 용례, 프레임워크들을 경험해볼 수 있었다. 또 다행이도 나는 학습 속도가 빨랐고, 더욱 다행이도 나는 아는 것을 실행하고 전파하기(a.k.a 말하기)를 좋아했다. 이제는 신입 개발자라면 누구나 읽어봤을 것 같은 클린 아키텍처와 도메인 주도 설계를 시작으로 버즈빌 시스템 설계를 개선해나갔다. 함께했던 ATF(Architecture Task Force) 멤버들(리암, 제리, 벤, 이든)과 준의 지지 덕분에 버즈빌 시스템을 마이크로서비스 아키텍처(Microservice architecture, MSA)로 전환할 수 있었다.

2021년 하반기 CPO 역할을 맡게 됐다. 한 해의 시작과 함께 조직이 개편되며 그룹이 나뉘었다. 내가 디맨드 그룹의 GPM(Group Product Manager) 역할을 맡은 뒤 CPO 역할을 맡을 때까지 짧은 기간 동안 너무나도 많은 일이 벌어졌다. 영과 존의 리더십과 굳건한 지지, 그리고 너무나 뛰어난 동료들 덕분에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실행하고, 성장하고, 기여할 수 있었다. CPO로서 경험을 서술하기에는 여백이 너무 좁아서(?) 별도의 글로 정리해보려고 한다.

배운점

학습 방법

부끄럽지만 버즈빌에 합류한 뒤에야 책을 통해 학습하는 경험을 했다. 젊은 시절 이성원은 남들이 이미 해본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갖혀서 몸으로 부딪히기를 좋아했다. 내가 하면 다르다는 생각은 그릿을 보여줄 수 있지만 학습에는 그다지 도움 되지 않는다. 버즈빌에 합류 이후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 책이었고, 마지막으로 받은 선물도 책이었다. (시계와 함께 받았다.) 버즈빌에서 배운 점을 굳이 하나만 뽑으라고 한다면 책을 통한 학습을 뽑겠다.

물론 독서 만으로 성장 엔진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실천 또한 ‘학습’에 포함된다. 버즈빌리언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지지와 참여 덕분에 지식을 실천으로 옮기는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다. 가끔 버즈빌의 장점을 질문 받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변화에 열려있는 조직이라고 답하고는 한다. 사람의 행동을 바꾸는 일이 가장 어려운 법인데, 버즈빌의 열린 문화가 많은 시도를 가능하게 했다. (물론 실패한 시도도 많다.)

리더십

영에게 처음으로 선물 받은 책은 High Output Management였다. 그 뒤로 OKR, 실리콘밸리의 팀장들, 코칭 리더십, 멀티플라이어, 성과를 만들려면 실행하라 등 리더십에 대한 책들이 쏟아졌다. 그 외에도 리더십 세미나, 비폭력대화, I Message 등 다양한 교육을 받았다.

그간 10명 정도의 가족 단계 스타트업에 있다가 120명 정도의 부족 단계 스타트업에 합류하니 리더십이 어떤 것이고 왜 필요한지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개인의 성장을 그가 미치는 영향력의 확장으로 정의하기도 하는데, 리더십이 그 성장을 만들어준다. 나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좋은 리더와 좋은 팀 덕분에 할 수 있었다.

데일 카네기는 누군가에게 어떤 일을 하게 만들려면 그가 그 일을 하고 싶게 만드는 방법 밖에 없다고 했다. 내가 충분히 그 일을 잘 했는지 스스로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리더십은 학습의 영역이기에 내가 노력한 만큼 성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조직 구성

콘웨이의 법칙에 따르면 시스템은 조직을 닮는다. 팀 토폴로지에 따르면 팀 사이 의존성이 팀을 느리게 만든다. 잘 굴러가는 팀을 해체하는 것 만큼 바보 짓은 없다. 그만큼 조직 구성은 너무 중요하다.

CPO(+GPM) 역할을 맡으면서 가장 신경썼던 부분 중 하나는 조직 구성이었다. 팀의 멤버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 팀 리더는 누가 되면 좋을지, 팀의 스트림(Stream, 팀 토폴로어에서 사용하는 용어)은 어떻게 정의할지, 팀간 의존성을 어떻게 줄일지 고민하는 일은 끝이 없었다. 싱글 쓰레드 리더십의 정의는 쉽지만 실천은 전혀 다른 얘기였다. 다음 스타트업을 생산성 도메인으로 생각하게 된 이유도 조직간 의존성과 인지 과부하를 줄이고 싶어서다.

돌아봤을 때 버즈빌의 조직 개편 중 가장 잘했던 일 중 하나는 디맨드 그룹과 서플라이 그룹을 나눈 것이었다. 나는 당시 두 그룹에 속하기 어려운 팀들 때문에 약한 반대 의견을 냈었지만, 영과 존은 깊은 고민 끝에 그룹을 나누기로 결정했다. 정작 그룹이 나뉘고 나니 각 그룹의 고객이 명확해졌고, 하지 않을 일을 정하는 일이 훨씬 수월해졌으며, 덕분에 각 그룹에 매우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반대했던 기억이 무색하게도 그 결정과 실행력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물론 항상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일’은 발생한다. 지금 버즈빌은 그룹간 사일로 현상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앞을 향해 나아가기

10년 이상 함께 해온 동료 황호성(a.k.a Liam)과 새로운 스타트업을 창업할 예정이다. 둘이서 치열하게 풀고자 하는 문제를 정의하고 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원칙과 조언이 넘처 흐르지만 그 중에서도 다음 내용은 특히 중요하게 지키려고 한다.

Tenets:

  • 빠르게 런칭한다. (런칭은 원래 여러 번 하는거다.)
  • 고객의 이야기를 듣는다. (고객 집착Customer-focused이 아닌 고객 중심Customer-centric 사고를 탑재한다.)
  • 가설과 실험에 기반한 성장 엔진을 구축한다. (학습하는 법을 학습한다.)

목표만 있고 프로젝트가 없으면 꿈, 목표가 없고 프로젝트만 있으면 취미라고 한다. 목표과 프로젝트가 둘 다 있을 때 비로소 진척(Progress)이 생긴다. 우리는 진척을 만들 것이다.

마무리

이렇게 4년 반의 여정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는다. 지금은 새로운 도전에 온 힘을 쏟기 위해 일주일간 발리에 충전하러 와있다. 습하고 더운 1월의 발리는 여러가지로 추운 이 시기에 마음을 비우고 에너지를 충전하기에 그만이다.

함께했던 모든 버즈빌리언과 10년 넘게 함께한 42멤버들, 함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호성이, 혼자 푹 쉬고 오라고 여행을 보내준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너무너무 귀여운 우리 해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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